INTENTIONAL INCIDENT  의도된 우연 (English text below)

    2015 이현배

    

 

    “내 작품에 정신과 육체를 주어 무언가 자율적인 존재가 되게 하고 싶다.”

    물감을 의도적으로 붓고 뿌린 불어내어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 내었다.

    나는 풍경이 그림 안에서 재현(represent)”됨이 아닌 현존(present)”하게 보고 싶었다.

 

    내 작품들의 핵심은 우연적인 만들어진 의도치 않았던 흔적 들에서 새로운 미적 감각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  

 

    주로 먹물이나 유화물감을 묽게 희석한 것을 캔버스에 붓고 드라이기로 불어내며 말리고 이를 배경 삼아 그 위에 연상되는 이미지들을 다시 흘려 넣었다.

    붓을 대지 않은 자연스러운 물감의 흔적을 의도적으로 통제하여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 내었고, 이는 또 다른 무언가를 연상시키는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

    캔버스 안에 스며들지도 떠 오르지도 못하는 물감의 모습은 표현이나 재현이 아닌 존재 자체로서 그 자리에 있다. 이들은 떠오르지도 가라앉지도 못하면서

    잘 섞이지 못 하는 나 자신의 모습과도 많이 닮아있다.

    현대미술에서 정해진 답은 없지만 각 작품은 저마다 다다라야 할 해답은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최소한 최선은 있을 것이다.

    우연적인 효과로 만들어 진 배경의 이미지는 이 어려운 문제를 풀기 위한 훌륭한 힌트를 제공해 준다.

 

    뉴질랜드 Whitireia에서의 레지던시는 나에게 작업에 완벽하게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주었다.

    많은 영감과 자극을 통해 다양한 시도를 함으로서 작업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할 수 있었고, 사람들과의 적극적인 대화로 내 고민들을 나누고 발전시킬 수 있었다.

    특히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특별한 모습의 화산 지대와 맑고 푸른빛의 바다,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눈 부시게 강한 콘트라스트의 태양빛, 오염되지 않은 공기에 의해

    멀어진 가시 거리 등은 내게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었다.

 

    이현배,  

 

 

 

 

    INTENTIONAL INCIDENT 의도된 우연

    “I want to let my works be autonomous so they can take on a soul of their own.”

    “I intentionally poured and blew the paint to create landscapes.

    I wanted to make them present in my paintings, rather than to be represented."

 

    All my works are about finding aesthetics from unexpected traces that I specially produced.

 

    I normally produce each background with lots of turpentine or watery Korean traditional ink.

    The runny paint flows onto the canvas and leaves certain traces naturally.

    I use a hairdryer to blow and dry the background. The traces without any brush-stroke have new shapes through the intentional control, they become

    something that can give other associations and inspirations. They exist on their own positions both neither submerging, nor emerging on the canvas.     

    This shows my own self which is; floating neither submerging nor emerging and un-mixable between Eastern and Western self.

    Although there is no law or rule of art making in this contemporary art scene, I believe in that every artwork has its own answer. Even If there is no ‘answer’,

    there will be ‘the best’ at least. The accidental effect of background image provides me the great hint to solve the question, which is called an art work.

 

    The residency in New Zealand and Whitireia were perfect circumstances that I could completely focus on my work. Unfamiliar volcanic geography, clear sea,

    the very strong contrast of the sun light of winter and long visible distance with the clean air, they opened new perspective to me.

    I could grope for a new direction of my work with these stimulations from the new environment, and develop my ideas through positive conversations with people.

    I wish the ideas can be sympathized by the two shows in Korea and New Zealand.

 

    LEE Hyunbae, 2015

 

 

 


    작가 이현배의 유산

    2014

 

    사람들은 기억 속에 많은 것을 담고 산다.

    보통 추억이라고 명명하는 그것은 때로는 구체적인 형상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지극히 추상적인 무언가가 되어 우리들에게 공감을 주기도 한다.

    지난 4, 성남에 있는 이현배 작가의 작업실에 방문했을 가장 눈에 들어오는 작품이 하나 있었다. 그것 작은가 스스로 “사부곡”이라 명명한 작은

    소품이었다. 작가 특유의 흘림 기법이 도처에 곳곳이 배어있지만 가운데 묘비명처럼 은은한 기운으로 배어 나오는 문구들이 눈에 띄었다.

    이는 이현배 작가의 아버님이 30여 년 평소 할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에 지은 한시를 아들인 이현배 작가가 자신만의 언어로 승화시킨 작품이다.

    한참 후 아버님이 급작스레 돌아가신 작가 또한 아버님이 그랬던 것처럼 아버님을 그리워하며 만든 작품이기에 감흥은 배나 깊숙이 보는 이의 마음을

    파고든 것이.

    이것은 유산이다.

    시간이 흘러가서 영겁의 때가 도래하더라도 아버지를 그리는 아들의 마음은 영원하다.

    작가의 팔레트 위에 퇴적층처럼 쌓이는 물감처럼 낡고 먼지가 끼더라도 혼은 퇴색되지 않는다.

    무의식 속에는 그리움의 마음이 기저에 깔려있고, 작업실 곳곳이 이러한 기운은 살아있다. 작품 곳곳에도 작가의 무식의적 기운은 파편처럼 여기저기 널려있었고,

    이는 객관적인 사실보다는 직관에 의존하는 작업방식과도 닿아있다.

    작가 이현배는 현실에서 보이는 사물들을 담는 것에 지쳐있다. 작가의 생각에 의하면 우리가 일상 속에서 보는 모든 것들 사실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가 아니라 한다.

    작가는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역동적 이미지의 연속성을 잡아낸다. 캔버스 안의 꿈틀거리는 이미지는 불교에서 무한의 시간을 나타내는 영겁의 순간처럼 보이기도

    하고 천지창조의 일그러진 풍경으로 보이기도 하면서도 일면 휴거의 그것과도 닮아있다. 작가는 이를 “주관적 리얼리티”라는 용어로 제안한다.

    전시주제인 mindscape 직역하자면 마음 풍경을 의미한다. 풀어서 말하자면 “정신적 활동의 시각적 재현”인 셈이다.

    이번 mindscape 연작은 관자로 하여금 진정한 의미의 풍경은 무엇인지, 절대적 미의 가치에 대한 화두를 던짐과 동시에 무의식의 세계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타인에게 의존하지 말고 고유의 자아를 성립시킬 있는 고색창연한 , 무형의 유산을 찾으라는 경고성 메시지를 던지는 같다.

    다시 돌아가 이현배 만의 유산을 보자. 작품들에는 공통적인 시각적 코드로 뒤틀어진 내장이나 핏줄 같은 오브제가 눈에 띈다.

    얼핏 보면 괴이해 보이지만 이는 혈연을 상징하고 조상에게서부터 내려오는 , 무형의 유산을 상징한다. 대동여지도를 만들면서 김정호는

    “ 산은 땅의 근육이요, 산등성이는 땅의 뼈이며, 물은 땅의 피이고 하천은 땅의 혈맥이요” 라고 말했다. 캔버스 이현배 만의 추상산수화 속에서는 혈연과 혼을

    상징하는 작가만의 물과 하천이 무의식 속에서 잔잔히 흐르고 있다.

    하늘 , 흩뿌리기 기법으로 여기저기 펼쳐져 있는 먹의 편린들은 아직까지도 작가의 마음 시골 고향 “도림골” 의 빛과 바람처럼 이곳 저곳 도처를 방황하며

    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갤러리 아트컴퍼니 대표 김지환

 

 

 


     2012. 6. 이현배

    나는 작업을 시작함에 있어 직관을 믿는 편이다. 처음 캔버스에 붓을 대며 흰 화면을 메워 나가는 초벌 작업은 가장 즐거운 과정 중에 하나이며 내가 가진 감각을

    잘 드러내 준다. 직관적인 붓의 방향, 힘의 강약, 선의 굵기와 속도감 등은 그림이 완성됨에 따라 점차 가려지고 소멸되며 묻히게 된다.

    사라져 버릴 것을 붙들 방법이 없을까? 드로잉의 느낌을 페인팅 안으로 끌어올 수는 없을까? 거칠지만 자유롭고 삐뚤삐뚤하게 몇 번을 고친 선 이더라도 그대로

    회화 공간안에실존케 해 보고 싶었다. 실재적 배경위에 자유로운 드로잉 선들이 그어지고 이것들은 스쳐 지난 시간의 기록인지, 상상의 환영인지 모르겠지만 아주

    분명히 그 자리있다”. 부서져 버리고 사라져 버리기 쉬운 습작들 같은 이 드로잉 들은 육신(덩어리)을 가짐으로써 사실적 회화 내에서 주체가 된다. 공간 내에

    빛으로 드로잉 했던 피카소처럼 내 회화공간 내에 드로잉의 자유를 부여코자 한다.

    2011년 3 29일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항상 원치 않는 이별은 원래 갑자기 찾아오는 건가 보다. 아버지께선 그렇게 훌쩍 가셨다. 10살에 죽든 100살에

    죽든 죽는 것은 매 한가지라 하셨다. 아버지의 말씀대로 죽음은 늘 가까이에 있다. 죽지 않으면 사는 것이고 살지 않으면 죽은 것이다. 그 뿐이다. 죽음도 삶의

    일부 인 것 같다. 나는 죽음을 대단히 특별하고 극적인 것이 아닌, 지극히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고 싶다. 물질로서, 육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하여

    어찌 없는 것이라 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다른 무엇도 아닌 내 아버지를 말이다.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것들은 항상 그 자리에 있다. 볼 수 없다 하더라도 느낄 수 있는 존재들은 분명 존재한다. 관조, 관찰자로서의 나는 그들을 모두 시각화 해 내고 싶다.

    이 최첨단의 시대에 나는 속도가 그리 빠르지 못하다. 현란한 3D그래픽이 일반화 되어있는 이 시대에 내가 시각예술가로서 해 낼 수 있는 것이란 과연 무엇일까?

    각종 특수효과가 발전할수록 표현영역은 넓어진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내게 그림은 더 그림다워야 재미있다.

    초벌로 바른 물감의 흔적들은 과연 매력적이다. 제스처들을 따라난 물감의 자국들을 구체화시킨다. 그 붓 자국 들은 또 다른 무언가를 떠올린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풍경속에 물감덩어리가 섞여 든다.

    물감은 그림의 소재이자 주제, 재료이자 대상이다. 물감은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만 같다. 내 물감은 특정 형태(대상)를 재현하거나 묘사하지 않고

    그저 튜브에서 팔레트로, 팔레트에서 캔버스로, 입체(물질적 물감)에서 평면(그림의 재료)으로, 평면()에서 입체(형태)로 옮겨 다닌다.

 

 

 


    Contents of my works(2009~2011)

    2011. Sep. Hyunbae Lee


   I want to let my works be autonomous so they take on a soul of their own.

    In addition, I am very interested in how a single reality can result in different realities due to many personal reasons.

    For example when I was younger I pointed

    to something wriggling in the sky. However, my friend could not see it. I was seeing floaters, deposits in my eyeball reflecting off my retina.

    It amazed me how the floaters were very real to me, yet my friend could not see them.

   Based on this experience, I came to the conclusion the act of seeing cannot be 100% objective. Can the human eye truly perceive objectively,

    and what does it actually see? This is the basic starting point for my works.

   Initially, I preferred realistic images. I tried to organize and plan every detail about my works from A to Z. However, I was not satisfied with the

    results of this method.     Later, around 2006, I asked myself, “Do truly objective images exist?” From that point on, my recent works have started

    with this question. I no longer believed that

    a 100% objective and common reality existed; I started focusing on other images which were more strange, mystic, and ambiguous.

    I called these images “subjective     and suggestive reality.” I would like the subjectivity to be understood as not originating from the artist,

    but rather the work itself. I started researching accidental technique and effect. I produced autonomous effects by casually pouring and sprinkling

    paint onto the canvas, letting the runny oil paint (with lots of turpentine) flow into a design on its own. Using a hair dryer also magnifies the sense

    of space and freedom this technique produces even further.

 


   Autonomous Paintings

    I produced this series by capturing the flashes of inspiration and association triggered by the accidental technique and effect described above.

    I harnessed the same pareidolia that causes us to see a man in the moon. These works might be real cloudscapes up in the sky or unknown universes.

    Like the title is Autonomous Painting, the viewer is allowed to interpret as they wish.

   The color blue is prominent in my works. This color gives me the sense of big oceans and small cells at the same time; the high sky over the sea below.

    The blue background may be inspired by my childhood seaside home, or it might reflect my more recent nomadic experiences traveling above the clouds

    by plane. To me blue means abyss, sky, universe, in and out. The core of the Autonomous Painting series is the process of giving a special meaning to a

    meaningless thing..

 


   Skyscape

    When I go above the clouds in an airplane I get the feeling everything in the world is not a big deal. As long as we live just for the sake of living our

    perspective will be narrow. A small problem will seem too big, difficult, and important. Sometimes I need to remind myself to step back and see everything

    from a better perspective, as when I look out the window of an airplane.

    Although titled Skyscape the images in this series could be interpreted as the ocean floor or even waves on the sea. The exact scale is left to the imagination

    of the viewer. The images could be many times larger than the viewer, like clouds beneath an airplane, or much tinier, like a cell seen through a microscope.

   Like our problems in life, it depends on the perspective of the viewer. Since the scale is meant to be anything but realistic, these paintings induce the romantic

    dream of escaping reality. Ironically, this dream of escaping reality gives me more energy to live in my reality.

 


   Paintscape

    I am not very interested in worldly matters. I do not watch TV news or sports games like other men. I prefer finding inspiration from within myself.

    This is one reason I isolated myself for several years. During that period, I asked myself, “What would happen if my works were created in isolation

    from the rest of the universe, like myself?” Without any other subject to paint, paint itself became the background, subject, object, the body and soul

    of the Paintscape series. It eats its self and feeds itself. The resulting images of paint are simultaneously readable and unreadable.

 


   Paintorama

    Usually the gallery cannot influence my works; my works are completed far before I know which galleries will house my works. However,

    the Nanji Gallery is different. It has a unique cylindrical shape and I had foreknowledge that I would have a solo show here. I decided to

    make a panoramic landscape. It stretches longer than 30 meters along the entire diameter of the gallery.

   The landscape is a window to the real-world surroundings of the Nanji Gallery. Instead of recreating a realistic image, I intentionally distorted

    the landscape to emphasize that truly objective and realistic seeing is not possible. The audience gets “into” the painting and sees the world

    from my perspective and how I see the world through my filter.

 

    Colorless Paints

    This series is started with the same sort of idea of the Paintscape. I just wanted to paint only with the paint itself. I regard the paint as an object.

    I am rather interested in the shape of it, than the color in this series. The mass of paint on my palette is like a mountain, organs in our body and so on.

    I removed the color of paint, so that the viewer can recognize the shape of it and get different associations. It could have a freedom to be many different things.

 

    PAINTRAWING

    I believe in my intuition when I start a new work. The first step of my working process, which I fill the blank canvas with my first brush strokes is one

    of the most joyful process and it shows my intuitive sense well. The direction of the intuitive brushstroke, strength and weakness of power,

    thickness and speed of line will be varnished and buried as the painting is progressing. 

    Can I catch something that will be disappeared? Can I drag the feeling of drawing into a painting? Even if they are very rough and not clear lines,

    I wanted to let them ‘really existing’ in my painting. On top of the realistic background, the free drawing lines are settled down. No matter they are

    the record of past or illusion of imagination, they are surely ‘there’ anyway. The very vulnerable and sketch-like drawings are having bodies and they

    turn to be the subjects in my painting. I want     to give a freedom to my drawings as well as Picasso did space drawings with light in an empty room.

    On March 29th in 2011, my father passed away. Every unwanted farewell comes unexpectedly early. My father went suddenly like that.

    He said that die in 10 years or 100 years are the same death. Likewise, the death is always beside me. You live if you are not dead and you die if you are not live.

   That’s it. Death is a part of life. I want to regard the death neither dramatically nor specially, but naturally. How can I say something does not exist, even if it has

    not physical body? Not to speak of nothing else, but my father.

    Something should be somewhere it supposed to be. If you cannot see, but something you can feel is there to be sure. I, as a contemplator or over viewer of     

    human beings life, I want to visualize them.

    In this world of hyper technology, I am not a very early adaptor. What can I do as a visual artist in this era? As the technology of the special effect is developing

    and widens its territory of expression, I am rather interesting analogue painting, which is very painting like.

    The first brush stroke on a canvas surface is surely attractive. I visualize the first gestures. Sometimes they remind me something else. Paint masses are melting

    into a very ordinary life.

    Paint is my object, subject, supply or theme at the same time. I think the paint can be anything.

    My paint does not represent certain shape, but it does exist itself in my paintings. It goes and comes from the tube to palette,

    from palette to canvas, from 3-dimension (physical paint) to 2-dimension (supply of painting) and from 2-dimension (color) to 3-dimension (shape).

 

 

 


    불확정성의 매혹, 우연과 집요함의 역설적 이중주.                                          

    2010. 10.   정수경/ 미학

 

    0.

    ‘ 주목 경제(attention economy)의 시대라고들 한다. 허버트 사이먼 등의 경제학자들이 1990년대 말 들고 나온 이 개념은 동시대 경제활동에서 주목과

    관심을 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한다. 이들은 주목하다 라는 말의 영어 표현이pay attention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주목은 그저 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불하는 것이다. 아까운 것이고, 함부로 남발할 수 없는 것이다. 주목은 오직 심리적 지불 의사를 촉발하는 대상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주목은 제공되는 재화와 정보, 이미지의 양이 늘어난다고 해서 같이 늘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한정된, 희소가치가 있는 자원이다.

    그러므로 재화와 정보, 이미지가 넘쳐나는 스펙터클의 사회가 심화될수록 각각의 재화와 정보, 이미지가 주목을 받을 확률은 더욱 떨어질 수 밖에 없으며,

    역으로 주목을 받는 것이 성공의 일차적 조건이 된다. 주목을 받는 것이 중요함은 미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니, 시각예술-눈의 예술-만큼 주목(注目)-

    눈을 사로잡음-이 중요한 분야도 없을 것이다. 특히나 그 규모가 어찌되었건 지속적으로 확장되고 있는 동시대 미술 시장에서 이제 주목을 받는 것은 성공을

    위한 기본 조건이 되고 있다. 넘쳐나는 작품들 중 얼마나 많은 작품들이 주목 받지 못하고 주변부로 흘러가버리며, 또 얼마나 많은 작품들이 자을 흘깃 스치고

    지나가려는 시선들을 잡아채고 붙들어 두기 위해 애를 쓰는가. 이현배의 작품들은 그런 면에서 일차적 성공조건에 가까이 다가서있다. 상당한 크기와 물감의

    물질성에서 비롯되는 강렬한 첫인상은 보는 이의 주목을 잡아 끄는 힘을 지녔다. 그런데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왜 그의 작품에 주목하게 되는지를 묻는다면,

    그의 작품의 힘 혹은 미덕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강렬한 그의 그림이 친절하기까지는 않기 때문이다.

 

    1.

    미술작품이 관람자의 주목을 끄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동시대 미술에 관해서라면 일차적으로 관람자들과 공유할 수 있는 문제의식의 표현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동시대의 사회적 이슈들을 시각적 형식 속에 비판적으로 녹여내거나, 채 아물지 못한 역사의 상흔들을 재 형상화하는 작품들 앞에서 우리는 일단 멈춰 서게 된다.

    또한 우리에게 지독하게 각인되어 있는 시각의 관습들을 교란하고 파열시키는 작품들도 주목을 받기 마련이다. 다른 한편, 분열되고 파편화된 주체의 자아상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하여 관람자의 내밀한 고인을 건드림으로써 주목을 받는 작품들도 종종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이현배의 작품들에서 이러한 명시적인 문제의식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그가 문제의식 없는 작가라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문제의식을

    작품으로 형상화 하여 외부로 드러내는데 머뭇거리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혹은 작품의 그 모호한 형상들이 프로이트가 꿈에 관해 설명했듯이 응축되고 전치된

    형태로서 그의 문제의식들을 무의식적 층위에서 드러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라면, 보는 사람이 작가의 무식적 층위로 접근하는 것이 가능할까?

    미루어 짐작하는 모든 것들은 오직 관람자들의 무/의식의 내용일 뿐인 것은 아닐까? 일견 오토마티즘을 떠오르게 하는 그의 형상들로 인해 이현배의 작품은 정신분석학

    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적절할 듯한 인상을 풍긴다. 그러나 라캉 조차도 꺼려했던 그 분석 작업을 일개 비평가인 나로서는 엄두를 낼 수 없다. 프로이트도 자신의

    정신분석학을 형상화하겠다고 나섰던 초현실주의를 가장 우려했다고 하지 않은가? 무의식의 층위를 의식의 층위로 옮겨놓는 것은 언제나 과잉이나 부족으로 끝날 뿐이다.

 

    2.

     기왕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이현배의 작품을 오토마티즘으로 바라보는 것은 과잉인 동시에 부족이다. 그는 2008년에서 2009년에 걸쳐 만들어낸 작품들에

        ’Autonomous Painting이라는 근사한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이 이름이 그 작품들의 형상이 지니는 초현실적 형태들과 결부되면 금새 오토마티즘, 즉 자동기술법

    이라는 기법을 떠오르게 만든다. 묽게 푼 유화물감을 바닥에 누인 캔버스에 부은 후 형상화의 운명을 드라이기의 바람에 맡기는 그의 작업 방식은 확실히 우연 이라는

    오토마티즘의 핵심개념과 맞 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작가가 어느 정도 바람의 방향을 조절할 수 있겠고, 주로 캔버스의 바깥쪽을 향해 뻗어나가는 물감의

    움직임은 이러한 작가 의지의 결과물이 겠지만, 묽은 물감이 뜨거운 드라이기의 바람에 마르면서 캔버스에 고착되는 신속함은 작가의 의지를 일정하게 무력화 시켰을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작품 전반을 우연과 자동기술이라는 협소한 개념으로 읽어내서는 곤란하다. 그의Autonmous Painting들에서 확연히 눈에 띄는 특징이

    그러한  우연성의 분위기를 짙게 풍기는 바닥을 배경으로 강하게 도드라지는 일정한 형상들의 대조적인 집요함이기 때문이다. 그가 자율성을 부여하고 싶었다던 이

       ‘자율적인 회화’    들에는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일정한 형상들이 있다. 그것은 때로는 구름, 때로는 화산연기이고, 어떤 경우에는 그저 물감덩어리이기도 하다.

    이 형상들의(자연에서의) 형상화 원리 자체가 우연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다. 옳은 주장이다. 구름이 코끼리처럼, 혹은 포효하는 맹수처럼 보이는 것은 누가 그리

    의도해서 된 것이 아니다. 작가가 팔레트에 물감을 짜내어 그것들이 하필 그런 형태의 복잡한 덩어리가 되어버린 것도 작가의 공들인 계획적 작업은 아니다. 그러나

    그 우연은 작품으로의 형상화 이전 단계에서 개입하는 우연이다. 그가 그 우연적인 형상들을 작품에서 형상화하는 방식은 우연과 거리가 멀다. 그의 구름, 그의 화산재,

    그의 물감덩어리는 상대적으로 작은 붓질들을 수도 없이 반복함으로써 형상되어 있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마치 뇌의 주름 같기도 하고 생선의 창자 같기도

    한 겹겹이 중첩된 형태들로 그려져 있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우연일 수 없지 않을까? 이 형상들에서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작가의 집요함과 선명한 형상화 의식이다.

    강박에 가까운, 때로는 자폐적이라고 느껴질 정도의 집요한 븟질이 만들어 낸 형상들이 우연히 뿌려진 묽은 물감을 배경으로 하여 더욱 도드라지게 강렬한 인상을 풍긴다.

 

     이현배의 작품이 보는 이로 하여금 발걸음을 멈추고 주목하게 만드는 힘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하는 것 같다. 우연과 집요함의 묘한 공존이 만들어내는 이상한 울림.

    이 울림은 현악기의 팽팽한 현의 긴장은 풀기 위해 존재한다. (적어도 프로이트는 이렇게 생각했으며, 현실적으로도 긴장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살고픈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긴장이 풀리기 전에는 이현배의 작품에서 눈을 떼기가 쉽지 않다. 긴장은 어떻게 해소될 수 있겠는가? 우리가 그 작품을 형식적이고 내용적인 차원에서

    ‘이해하는 순간 해소될 것이다. 물론 그러한 긴장의 해소와 완화는 편안한 마음의 즐거움을 가져다 줄 수 있고, 그 또한 좋은 경험일 것이다. 그러나 살짝 시시해진다.

    작품은 텍스트나 사유로 다 치환될 수 없을 때 더욱 탁월하지 않은가?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런 긴장감의 조건 속에서, 그의 작품들이 구체적이고 지시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 않은 것이 도리어 미덕이 될 수 잇는 지평이 열린다.

    내용의 부재는 긴장의 완화를 지연시킨다. 긴장의 지속은 시각을 예민하게 하고 사유의 칼날을 날카롭게 벼린다. 긴장의 완화가 지연될수록 그림의 더 많은 부분들이

    시각으로 들어올 것 이고, 사유는 기존의 관습적 태도를 버리고 상상력을 동원하여 자유롭게 유희하게 될 것이다. 즐거워질 것이다. 참으로 즐거워질 것이지만,

    왜 즐거운지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설명할 수 없음은 부덕의 소치가 아니다. 설명할 수 없음은 예술의 본성이다.

 

    3.

     그런데 예술가는, 또 비평가는 작품을 설명하라고 요구 받는다. 때로는 관람자들의 이해를 도모하기 위해, 때로는 기금을 지원받을 자격을 입증하기 위해.

    그야말로 독이 든 성배와도 같다. 마시지 않는 자 얻지 못할 것이고, 마시는 자 중독될 것이다.

 

     ‘Autonomous Painting은 해석에 저항하는 작품들이다. 불확정성이야말로 이 작품들의 가장 큰 미덕이다. 그러나 잇따른 지원프로그램과 그를 통한 해석에의

    요구를 경험하면서 이현배는 이 불확정성에 대한 확신을 잃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찌 부면 작가는 지금 확정성과 불확정성 사이의 갈림길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매트릭스>에서 네오가 모피어스가 내민 파란 알약과 빨간 알약 중의 하나를 택함으로써 이후의 삶을 결정해야 했던 순간과도 같이, 해설 가능성을

    택하는 순간, 이현배의 작품이 지니는 설명할 수 없는 매혹들은 마치 움켜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사라지고, 그의 작품들은 고답적이고 진부한 것을

    탈색되어 버릴 것이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의 작품에 붙여지는 모든 해석적 진술들은(나의 것을 포함해서) 작품에서 불확정적인 부분들을 괄호치고 그에 대해

    침묵 할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필경 일종의 오독일 터인데, 역설적으로 그것이 득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작품은 해석의 포획하려는 마수를 빠져나가기 마련이고,

    작품이 가지는 불 확정성은 다시 오롯이 작품으로 되돌려진다. 주어진 해석에 동의할 수 없는 사람들이 생길 것이다. 그들 중 누군가는 그 곁을 신속이 떠날 것이지만,

    또 누군가는 자신만의 또 다른 해석을 위해 작품을 뚫어져라 바라볼 것이다. 해석이 유쾌한 유희의 열린 장으로 여겨지기만 한다면, 해석이라는 성배에 든 독은 그저

    한 순간을 기분 좋게취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약이 될 수도 있다.(데리다는 영어에서선물 을 의미하는gift가 독일어로는 을 의미한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해준다.)     

    서로 다른 다양한 해석들은 작품을 바라보는 감상의 지평을 보다 풍요롭게 해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 상황에는 전제 조건이 있다. 작품의 불확정성이 관람자의 주목을 잡아채고 붙들어둘 수 있을 만큼 집요하고 강렬할 것. 아쉽게도 2010년 이현배의 작품에서는

    2008년과 2009년의 작품들만큼의 집요함과 강렬함을 느낄 수 없다. 소위 말하는 밀도가 떨어진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경향은 그의 작품이 작아지고 그가 유화 물감이 아닌 조금은 다루기

    쉬운 수채물감을 사용한 작품들에서 더 도드라진다. 거꾸로 말하자면, 큰 작품, 다루기 까다로운 매체에서 작가의 집요함이 생생히 살아나는 것 같    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이현배가 다시금

    쉽사리 통제할 수 없는 큰 작품에 편집증적으로, 밀도 있게 임하기를 바래본다. 한시도 편안해질 수 없는 불확정성을 밀어붙이라는 비평가의 주문은 가혹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환상이

    아니고서는 인간 삶에서 안정이란 없다는 것을 상기해본다면, 그 주문이 꼭 그렇게 가혹한 것 만은 아니지 않을까?

 

 

 


    PAINTORAMA          

    2010. 7.  이현배                  

          

    과연 원작의 아우라는 상실되었는가...

 

    W. 벤야민 의 말처처럼 그야말로 이미지의 홍수의 시대이다.

    복제된 이미지/디지털화 된 이미지들의 홍수 속에서도 꿋꿋이 페인팅은 그 고유의 영역을 지키고 있다 약간은 잃어버렸는지 몰라도 말이다.

    전시회들을 접할 때 큰 부담을 느낀다. 아는 사람 전시 라서, 사진으로 봤던 것 대로 왠지 직접 봐야 할 것 같아서, 유명한 사람 거라니까...등등 잘 찍혀진 사진의

    이미지보다 과연 원작이 더 나을까...

    꼭 직접 봐야 하는 그림 이란 건 어떤 것 일까...

    난지 갤러리는 원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평소 눈에 관심이 많던 나로서 이번 전시에서 완벽히 관객에게 내 눈(필터)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관객은 작품 '' 으로 들어옴으로써 내가 작가로서 사물을,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나의 필터로 걸러진 이미지들은 또 다시 어떻게 관객에게 지각되는지...

    갤러리 바깥으로 보이는 360도의 광경을 한 폭의 파노라마에 담았다. 30미터가 넘는 그림이라 시작할 시점에 과연 퀄리티 있게 나올지, 완성이나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질 않았으나 파노라마 만이 이번 전시의 sight specific으로의 기능을 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생겼다. 삐뚤삐뚤 왜곡된 광경은 더 이상 객관적 '보다'

    가능치 않다고 얘기하고 있다. 나만의 세계를 직접 보게 됨으로써 작가와 관객이 공감하고 perspective를 공유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2010. 7. 이현배

 

 

 


    혼돈과 카오스에서의 출구로 통하는 상상력과 아름다움                      

    2009. 12.   하계훈 미술평론가

 

    이현배의 작품은 환상적이다. 그리고 그러한 환상적 작품에 관람객들이 공감하는 이유는 우리가 일상의 현실에서는 정확하게 경험한 적이 없지만 한번쯤 꿈속이나

    우리의 상상 속에서 본 듯한 이미지들이 이현배의 화면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이현배의 작품에는 마치 높은 하늘의 짙은 구름이나 화산폭발이 뿜어내는 연기,

    혹은 아메바나 연체동물 같은 살아있는 생명체가 자기 증식하는 것처럼 운동성을 보여주는 신비스런 모습으로 드러나며, 그것들이 우리의 과거에 대한 추억이나

    상상력을 자극해 준다.

 

    이현배가 이러한 작품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하늘을 나는 비행기 창밖으로 바라본 구름의 모습에서 모티브를 채택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은 모두 공감하겠지만 높은 하늘에서 비행기 창밖으로 펼쳐지는 구름밭은 바라보는 이들을 몽환적 상태로 인도하며 서서히 추억과 명상,

    상상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작가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제작한 자신의 작품에 하늘풍경(skyscape)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있다. 따라서 이현배의 작품은 추상과 구상의

    경계에서 작가와 관람자와의 경험이나 상상을 매개로 한 감각적 공유와 경험 및 정서적 소통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현배가 작품을 제작하는 방법은 서양미술사에서 20세기 초에 초현실주의 작가들이 즐겨 사용하던 자동기술법과 유사하다. 작가는 주로 청색계열의 묽은 안료를

    캔버스에 쏟아 부은 다음에 이 물감의 흐름이 만들어내는 흔적을 작품의 배경으로 채택한다. 이 과정에서 물감의 움직임에 대한 작가의 수작업이 조금 개입되고

    물감의 건조를 위하여 드라이어 등의 도구가 사용되기도 하자만 전체적으로 볼 때 화면 위의 이미지의 생성은 그야말로 자율적이고 자생적인(autonomous) 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 초현실주의자들의 자동 기술법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현배의 화면에서 드러나는 자동기술법적 이미지들도 의식과 논리의 개입이 최소화 되고

    우연성과 무의식의 선택이 우선되는 과정을 통해 형성된다. 작가는 “…흘리고 뿌려서 스스로 고이고 흘러내린 자국들을 따라 연상되는 이미지들을 따라간다.

    나는 캔버스에 정신과 육체를 주어 스스로 무언가 자율적인 존재가 되게 하고 싶다. 고 말한 적이 있다.

 

    이러한 자동기술법적 제작 방법의 배경에는 현실도피적인 태도가 숨어있을 수도 있다. 실제로 이현배의 작품에서는 환상적이면서도 카오스적인 요소를 발견한 수 있다.

    작가의 초기 작품 가운데 한 점에서는 재현적인 인체를 묘사한 다음 인체의 머리부분을 카오스적인 형상으로 표현함으로써 당시에 작가를 둘러싼 복잡한 상황을

    은유적으로 표현해본 적도 있다. 작품의 배경을 지배하는 푸른색의 공간은 무한한 우주공간이나 깊은 바닷물 속을 떠올리게 해준다는 점도 다른 새상을 꿈꾸려는

    작가의 의식을 짐작해 보게 만들어준다.

 

    도피적인 의식과 태도는 쉽게 부정적이고 염세적인 태도와 연결될 수 있다. 실제로 다다(Dada) 운동을 하던 예술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현실에 대한 부정은

    무정부주의적이고 허무주위적인 의식을 키우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이현배는 자신의 자동기술법적이고 환상적인 작품을 통해 이러한 부정적인 의식을

    키워가기 보다는 그 지점으로부터 그리기를 즐기는 작가 특유의 기질을 발휘하여 환상적인 조형적 아름다움과 스스로 형성되는 어떤 존재의 자율성을

    발견하고자 하였다.

 

    이현배의 작품이 주는 매력은 이처럼 환상적이고 자율적인 과정을 통해서 출발하여 작가의 조형적 의지와 노력이 꼼꼼하게 반영되면서 역동적이고 생명감을

    느낄 수 있는 어떤 것이 화면에 가득 담김으로써 보는 이들에게 공감적 체험을 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는 점 일 것이다. 신비롭고 역동적이면서도 혼돈과 카오스를

    연상시키는 이현배의 작품 속에서 우리는 환상적 아름다움과 상상의 즐거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화가의 기본 덕목은 성실한 그리기이며 그리기의 과정에서 떠오르는 생각과 그리기 과정에서 작가가 조우하는 모든 상황과 사물을 작품으로 통합시키는 능력,

    그리고 그러한 결과로서 작품에 드러나는 작가의 진정성이 관람객들에게 잘 전달될 때 작가는 예술가로서의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 지금까지의 이현배의 작품은

    이러한 요소들이 다소주관적이긴 하지만 비교적 잘 배합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앞으로 이현배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제반 요소들과 작가의

    진정성이 지속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러한 진정성이 어떠한 형식으로 발전, 전개될 것인가에 다라 이현배와 우리들 사이의 감각과 경험 및 의식의 진정한 교감과

    교류의 심도와 향방이 드러날 것이다.

 

 

 

 


    Autonomous painting- 이현배 개인전

    2009. 8. 서울시립 미술관 큐레이터-박이선

 

    “눈을 통해 응시하는 우리 앞에 우주의 아름다움이 드러난다...자연을 눈으로 봄으로써 영혼은 몸이라는 감옥 안에 있는 것에 만족한다. 눈은 영혼에게 창조의

    다양성을 표상한다. 눈을 잃는 자의 영혼은 태양을, 우주의 빛을 다시 볼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 캄캄한 감옥 안에 버려진다.”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Ponty)의

    「눈과 마음」(L'oeil et L'esprit)

    이현배의 작가로서의 출발은 눈앞에 아른거리는 듯 한 눈 속 세포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아주 어릴 적 눈을 감았다 뜰 때 느꼈던 반투명의 시야를, 외계의 또는

    이 세상 것이 아닌 어떤 것 이라고 생각하였다. (물론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보이는 이 잔상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작가는 시각이란 감각과 판단의 혼합물로,

    어떠한 사물을 보더라도 자신의 생각과 뒤섞여 그 이미지가 굴절, 변형된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모든 문화적 활동은 지각에 뿌리를 둔다 ”는 메를로 퐁티의 말처럼 이현배 또한 자신의 눈을 통해 본 찰나의 기억들을 작가만의 시각으로 재해석 해낸다.

    특정 형상을 보고 그리거나 실재에 가까운 형상을 기억해 내어 하는 작업이 아닌, 순간의 이미지를 자신만의 필터로 여과하여 작업하기 때문에 그의 그림을 마주한

    사람들은 작가의 독특한 세상을 함께 여행하게 되는 것이다.

 

    생성

    이현배의 작품세계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세계를 넘나든다.

    “예술은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 라는 파울 클레(Paul Klee)의 말처럼, 이현배는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어렴풋하게나마 공감할 수 있는, 그의 노스텔지어 속 푸른 바다, 숱하게 거닐 던 하늘 길, 눈을 감았다 뜨면 떠오르는 기억의 편린들을 블루라는 근원적이고

    신비로운 색에 녹여내고 있다.

    그는 캔버스에 푸른 안료를 부어 말리는 작업을 반복하는데, 이 과정 속에서 그는 인간의 근원에 가까운 추상적 이미지들(근원의 원형질 세포)을 화면 속에 불러들이고,

    작품을 보는 우리의 마음속으로도 불러들인다. 또한 이러한 이미지들은 무형의 우주 생물체가 되었다가, 푸른 심연 또는 아련한 하늘의 이미지가 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그의 블루 이미지들은 섬세하면서도 추상적이며 역동적이기까지 하다 .

    닿을 수 없는 짙은 그리움의 색인 블루는 비현실적이며 신비한 이미지로 사람을 현혹하는 색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독일에서는 꾸며낸 이야기를 ‘파란동화’라고

    불러왔으며,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는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에서 “파랑은 깊어질수록 우리를 무한한 것으로 이끌며, 순수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초감각적인 것에 대한 그리움만 일깨운다 ” 라고 하였다.

    이현배가 사용하는 블루 역시 신비로움과 깊은 향수에 용해되어 있어 그의 작품은 소용돌이치는 에너지와 힘이 느껴진다. 그러나 강한 이미지의 바탕에는 섬세하고

    여리여리한 블루 스펙트럼이 기저에 깔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에 따른 작가의 의도와 우연성이 만나 신비로운 형체를 띈다.

    이는 작가의 노마드적 경험에서 우러난 이미지 등을 그리는 듯 하나 그것은 보는 이의 생각일 뿐 작가가 실제적 표현을 시도한 것은 아니다.

 

    자율적 확장

 

    “... 흘리고 뿌려서 스스로 고이고 흘러내린 자국들을 따라 연상되는 이미지들을 찾아간다. 나는 캔버스에 정신과 육체를 주어 스스로 무언가

    자율적인 존재가 되게 하고 싶다”

    - 작가노트 중에서

 

    지금까지의 그의 작업을 살펴보면 그의 관심사는 줄곳 ‘사람은 대상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인식 하는가’ 에 관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업이

    지각 현상학에 입각해 이루어져 왔음은 너무나 당연하다. 우리는 이러한 의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그의 작품들과 새로운 작품들(이번 두 번째 개인전)의

    작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이번 작품들의 모티브는 작가의 유년시절, 여행 그리고 유학 시절에 숱하게 거닐었던 바다와 하늘 길, 그리고 소소한

    일상에의 관심의 표현이다.

     작가는 이러한 모티브들의 이미지와 더불어 미쳐 의도하지 않았던 물감의 흘림과 겹침을 화면 안에 재현함으로써 그로 인해 발생하는 흔적들 속에 또 다른

    새로운 이미지를 탄생시켜 보는 이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또한 이러한 이미지들은 역동적이며 꿈틀대고 있어, 그 자체로 생명력과 자율성을 가지고 확장해

    나가고 있는 듯 한 느낌 또한 갖게 한다.

    그의 그간 작업이 그림그리기 자체의 즐거움, 질료에 대한 연구, 시지각에 대한 탐구였다면, 이번 Autonomous painting전은 작가의 의도와 우연성의 결합으로 새

    로운 형상이 탄생되며, 작품 또한 밀도 있게 발전해 나가고 있는 과정 중에 있다.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신작은 신비로운 색감과 이미지를 바탕으로 하며 새로운

    소재를 통한 동물적 감성과 역동적인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지금까지 자신의 경험에 입각한 한정된 주제가 일상에까지 확대되어 다양한 소재와 색, 그리고

    역동적 화면 구성으로까지 확장해 나아가고 있다.

    미술계는 새로운 시각으로 매개를 재탄생 시키는 능력을 가진 이 작가의 향후 행보를 지켜봐야 함이 분명하다.

 

 

 


    -Autonomous Paintings-                                  

    2009. June.  Lee, Hyun-bae

    ‘I want my painting to be some kind of autonomous existence by giving a soul and body.

    I am very interested in eye perception and limitation. What range we can call subjective seeing and what is the boundary of imagination...

    Through various     experiments and investigations, I want to build my own expressional area. It has to be achieved neither realistic representation

    of image, nor abstract expression, but, suggesting new perspective.

    I would like to visualize it by connecting aura and energy field of everything, which is surrounding me and visible / invisible things with my inner eye.

    I do not trust human eye any more, I rather want to see the outside world with the third or my inner eyes.

    Autonomous Painting series is a works that I concretely pursue certain traces of flowed and dripped paint. The autonomous images could be real landscapes

    (looking down from airplane), or perhaps mystic spaces. Accidental and momentary idea of association is settled in my brain solidly.

    Blue background could be originated from my contemporary nomadic experiences that I have been wandering through airways a lot, or nostalgia of

    my childhood in seaside.

    Blue is abyss, sky, universe, inside or outside to me. The very fragile and vulnerable mystic and momentary images are placing on top of the backgrounds.

    I want to provide familiar or unfamiliar images to give a clear or ambiguous inspiration by strong catch

    my transient inspiration and visualizations of it.

    This whole process makes my works to be what they have to be and

    this is the core of the Autonomous paintings.

 

 

 


   작가노트-Autonomous Paintings-                                     

    2009. 6. 이현배

 

    ‘나는 캔버스에 정신과 육체를 주어 스스로 무언가 자율적인 존재가 되게 하고 싶다.’

 

    나는 눈의 지각력과 한계에 대해 관심이 많다. 어디까지를 객관적으로 본다고 말할 수 있으며 어디까지가 상상의 범위인가…

    여러 가지 실험과 연구를 통해 나만의 표현 영역을 구축하고 이미지로서 확립해 내고 싶다. 그것은 구체적인 이미지의 재현도, 추상 표현적인 감성의 표출도

    아닌 새로운 시각의 제시로서 이루어 져야 할 것이다. 나 자신을 비롯하고, 또 나 자신에서 벗어나 나를 둘러싼 환경에서도, 내가 있던 곳들, 사물들에서도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을 연결시켜 이미지들을 만들거나 내 안 깊숙이 있는 눈으로 에너지를 가진 모든 것에서 아우라와 에너지 장을 찾아내고 연결

    시켜 시각화 하고 싶다.

    더 이상 눈을 믿지 않는다. 3, 혹은 내 안의 눈으로 바깥 세상을 보고싶다.

 

     ‘Autonomous Painting’ 시리즈는 물감을 뿌리고 흘린 위에 연상되는 이미지들을 찾아 그대로 그려서 구체화 시키는 작업들 이다. Autonomous 라는 말

    그대로 자율성을 가진 이 이미지들은 실재하는 풍경 일수도(비행기 위에서 내려다 보는), 또 어쩌면 미지의 공간들 일수도 있다.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아이디어와 연상작용, 이들은 구체적이고 견고하게 머리 속에 자리한다. 푸른색의 배경은 숱하게 하늘 길로 떠돌아 다녔던 현대판 노마드적 경험에서

    비롯되는 것 일수도, 바다에서 지냈던 어린 시절의 향수에서 일수도 있는 동경, Blue  심연일수도, 하늘일 수도, 우주일수도, (inside)일 수도,

    또 밖(outside)일 수도 있다.  그 위에 손대면 부스러져버릴 허상과 같은, 또 계속 형태가 바뀌는 만질 수 없는 순간적인 이미지들이 조각처럼 단단하게

    자리한다. 찰나적인 영감과 시각화 된 이미지 들을 화폭에 붙들어 맴으로서 익숙함과 모호함을 동시에 가지는 낯익지만 낯선 그런 모습들을 제공하고 싶다.

    아무렇게나 흘린, 혹은 마구잡이로 붓 가는 대로 그어 생긴 물감 자국들이 스스로 이루어 낸 이미지들을 그대로 따 내어서 구체화 시키는 이 작업들에서

    그 그림이 생긴 대, 이루어 져야 하는 대로 완성되어 지는 모든 프로세스가 핵심적으로 작용 한다.

 

 

 


    The Core: painting ‘the heart of the matter’

    Margo Slomp

    2008. Feb.

    Any confrontation with the work of Hyun-Bae Lee leaves no doubt about it: this painter loves to paint. He loves the color, the smell, the flowing,

    the dripping and the drying of paint.  Deep blue watery stains of paint on the edge of a large canvas capture and guide our gaze to the brightly lit center.

    In another one a subtle layering and clustering of ochre suggests the very creation of life. In a series of smaller canvases intriguing shapes like corals float

    the surface. The images look somewhat familiar, reminiscent of underwater worlds or advanced photographic material of the insides of the human body,

    but are clearly no exact representations of these subjects.

    Any conversation with this painter will tell you: he also loves the way paintings touch those who watch them, the way people respond to seeing colors;

    he loves the feelings and thoughts paintings provoke and the conversations they raise. As a South-Korean artist having studied in Western Europe for

    two years the question of differences and similarities between Western and Eastern art is easily put. But he does not want to extrapolate between these two.

    He comes from the latter and has been emerged in the first for some time; they are very different worlds but both present in him and so he has set himself

    the goal to somehow ‘mix and harmonize’ the two in his work. In his case and for now it means destroying boundaries. Not by ignoring them, but by keep

    moving over and across.

 

    The vast area between spaces that can be seen and can be imagined is the realm of Hyun-Bae Lee. Triggered by tricks of the eye he became interested

    in what and how we see. But the perceived world means so much more to this artist than just the one that our eyes present to us. What if I could see

    inside my head? What if I could travel into space and look beyond? Could these spaces be one and the same? And might they represent something essential?     

    Questions like these inspire him to see, imagine and create space: physical space, but also the ones inside our heads, inside our hearts, reduced to the smallest

     at the level of microbiology, but also expanded to the largest space imaginable.

 

    Visual information and imagination thus get translated into paint. With these materializations Lee is embodying the images he sees before his eyes.

    One simple principle is most important for him: because he can see and imagine these worlds, he can show them to us and therefore they are real.

    Trust your eyes, he seems to say, trust your senses, trust your intuition, and trust your core. For the heart of the matter can be seen.

 

  Margo Slomp

    Art Historian and Core Tutor Art Theory at MFA Painting of the Frank Mohr Instituut, Groningen (the Netherlands)

 

 

 

   The Core: ‘본질(국문 번역: 이현배)

 

    이현배의 작품 앞에 서면 작가가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를 사랑한다는 것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물감의 색, 냄새 뿐 아니라

    그리는 동안 물감의 흘림, 뿌림과 말리는 전 과정을 사랑한다. 큰 캔버스의 짙은 푸른색의 묽은 얼룩은 우리의 시선을 중앙으로 이끌고, 미묘한 황갈색의

    그림에서는 겹겹이 이루어진 층들과 물감의 흔적들은 이 그림이 살아있는 생명체 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며 작은 캔버스의 연작들에서는 물감이

    마치 산호와 같은 모양으로 표면을 떠다니고 있기도 하다. 그의 이미지들은 어떻게 보면 흔한 물속 세계를 연상케 하거나 사람 몸 속을 찍은 사진과 같은

    느낌을 주지만 그의 어느 그림도 어떠한 정확한 대상을 재현 한 것은 아니다.

 

    작가는 그리는 행위 전반에 쏟아진 사랑과 관심이 그림을 통해 관객에게 전해지고 비로소 감동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2 년에 걸친 서 유럽에서의 유학은

    한국의 작가로서 동, 서의 다른점들과 공통점들에 대한 질문들을 가지게 했다. 그러나 그는 그 둘 사이를 어느 하나의 관점으로 섣불리 판단하거나 평가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 자신 에게는 동양과 서양이 동시에 존재하고 그의 작업 또한 융화’와 조화’로서 그 두 세계를 담으려 한다. 그에게 있어 융화와 조화는 둘

    사이의 경계를 파괴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들을 무시함으로 서가 아닌 둘 사이를 끊임없이 넘나들고 가로지름으로 이루어 진다.

 

    이현배의 쟁점은  우리가 볼 수 있고 상상 할 수 있는 공간들의 광대한 영역에 있다.

    그는 우리가 무엇’을 보고 어떻게’ 보는가 하는 눈에 관한 여러 현상들에 관심이 많다.

    그러나 지각되어지는 세계는 직접적으로 보여지는 사물 자체 보다는 훨씬 더 큰 의미를 가진다. 만약에 내가 내 머리 속을 볼 수 있다면? 만약에 공간들의

    안팎을 여행하거나 볼 수 있다면? 그 공간들이 모두 결국에는 하나 이거나 똑 같지는 않을까? 그리고 만약 그들이 무언가 본질적인 것을 나타낸다면?

    이러한 질문들은 작가로 하여금 새롭게 보게 하고, 상상케 하고, 또 다른 공간을 창조하게 한다. 그 공간들은 물질적인 공간일 수도, 우리의 머리 속 공간

    혹은 우리의 마음 속 공간일 수도 있으며 미생물학적 최소 공간의 축소 또는 팽창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대 공간일 수도 있다.

 

    따라서 시각적 정보들과 상상력은 물감으로서 그림으로 전이될 수 있다. 이현배는 이러한 물질화로서 그가 그의 눈이 보기도 전에 보는 이미지들로 구체화 시킨다.

    ‘그가 세계를 보고 상상하며 또 그것들을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그것들은 진짜다.’ 라는 간단한 원리가 그에겐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당신 눈을 믿으라,’  그가 말하는 것만 같다. 감각을 믿고, 직관을 믿으라 그리고 당신의 Core를 믿으라. 본질을 볼 수 있게 되기 위해.

 

    마르호 슬롬프

    미술 역사가, Frank Mohr Institute MFA 회화과 전임강사. 흐로닝헌, 네덜란드.

 

 

 


    작가노트

    2008 이현배

    -the Core-

    "나는 겉으로 터프 한 척, 강한 척 한다.

    그리고 그 속 으론 아주 약하고 섬세한 층이 존재하며

    또 그 안으로는 무엇보다도 강하며 곧은 내가, 어쩌면 너무 곧아서 깨질지도 모르는 경도로서 존재 한다."

    이 부분은 내가 전에 썼던 일기장의 일부 에서 인용해 온 것이다. 최근에 하고 있는 작업들의 concept이 이런 나 자신과 많이 닮아 있다고 느끼며 잘 맞아

    떨어진다고 생각 한다.

 

    우주적 공간과 심연 그리고 사람의 몸 속은 아주 많이 닮아 있다.

    이 Core시리즈에서 나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없는 공간, 그리고 그 공간의 확장과 축소 등에 대한 이야기를 동시에 사람의 몸 속 세포들과 우주 공간에 떠 있는 별들,

    그리고 깊은 물 속에 있는 생물들로서 표현 했다. 이 뒤 섞여진 이미지들을 통해 공간의 모호함을 그려내고 싶었다.

 

    나는 내 그림에 생명과 영혼을 주고 싶다.

    묽게 희석 시킨 물감을 뿌리고 붓고 한 후 붓 대신에 헤어 드라이어로 고인 테레핀 기름을 이리 저리 밀어내고 가장자리로부터 말려 나갔으나 나머지 손이 닿지

    않는 중간 부분에서는 자연적으로 마르게 둠으로서 그림을 완성했다. 붓으로 일일이 그려낸 그림이 아니라, 그저 재료를 주고 되는대로 놓아 둔, 말하자면 스스로

    그려진 그림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기름들의 무게가 캔버스 중심부분을 누르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르면서 저절로 하나씩 층을 만들어 내었다. 그런 층과 다른

    표면 질감들이 내 일기에서 나오는 나 자신과 많이 닮았다.

 

    캔버스와 물감은 나를 물리적으로 움직이게 하고 또 나는 그 물질들로 그림을 그린다. 거기에 내 진실함과 그림에 대한 사랑이 들어간다면 육체와 영혼을 모두

    가지게 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 물질들은 그 그림의 육체고, 나와의 친밀성, 사랑은 영혼이 될 것이다.

 

    한번은 내 영혼이 어떻게 생겼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내 육체의 모습이 아닌 그 어떤 것으로도 떠 올릴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거기에는 구분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무언가를 창조해 냄에 있어서 또 다른 생명체를 창조 하는 것 보다 고귀한 일이 있을까

    그것이 나와 닮은, 나를 가장 잘 표현해 줄 수 있는 모습과 혼을 가지게 하는 것이 예술가의 의무이자 역할이 아닐까 생각한다.

    –2008. 1. 이현배-